가피이야기http://nungin.net/Rss/rssGiGwang.aspx지광스님의 좋으신 말씀입니다.ko마음 속 불성이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19&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2.27 13:36 입력 발행호수 : 1127 호 / 발행일 : 2011-12-28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우리들 마음 가운데 부처님 계시다는 얘기를 수시로 하고 또 듣는다. 그 같은 얘기를 하거나 듣는 사람들은 그 가르침에 따라 얼마나 삶을 충실하게 살고 있는가. 부처님께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계시다면 우리의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항상 지켜보고 계실 텐데.</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포교사들의 삶은 나의 말과 생각과 행동을 부처님께서 항상 지켜보고 계시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된다. 포교의 길, 중생제도의 길은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지만 항상 부처님께서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시고 계시기에 경건하게 살아야한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 나를 지켜주실 것이다. 평생을 몸과 마음을 바쳐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고 연마하며 살아온 지난날의 체험을 통해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부처님께서 지켜보고 계시니 항상 기도 속에 부처님을 열심히 모시고 살아가라. 정진하는 포교사의 앞날은 부처님께서 지켜주시리라.</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부처님 말씀대로 우리들은 매일매일 매순간마다 눈과 귀, 코 등 모든 감각기관을 동원해 일체의 것을 찍어대며 산다. 항상 모든 것을 찍어대기에 화엄에서는 해인(海印)이라는 말을 쓴다. 하나의 거울을 생각해보라. 거울에 찍힌 대상들은 하나같이 잘못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그것을 고치려한다. 거울은 모든 것을 고치게 하는 위신력을 갖는다. 하나의 유리조각으로 만들어진 거울도 그러할진대 우주바다는 부처님 마음이요, 진리의 마음이요, 모든 것을 찍어대는 거울과 같은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마음거울이라는 말을 쓴다. 심경이 그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무한의 바다 물방울 하나를 바다라 부르지는 않지만 바닷물 한 방울에도 바다의 성품이 들어있다. 우리들 모두가 부처님의 바다에 떠있는 물방울 하나에 해당한다면 우리들 마음 가운데에도 부처님의 성품자리가 들어 있을 수밖에 없다. 우리들 마음에 불성이 있다는 얘기가 바로 이를 의미한다. “물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얘기가 한때 회자된 적이 있다. 물이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물이 신이요, 부처님 아니겠는가. 화엄에 ‘주수신’이라는 말씀이 계시 듯 물 한 방울에도 우주가 들어있고 부처님이 계시다면 나의 말 한마디, 생각 하나, 행동 하나에도 부처님이 계시고 부처님께서 찍고 계시다는 생각으로 살아야만 한다. 갖가지 업장으로 고통을 받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같은 마음으로 산다면 분명히 부처님께서 지켜주실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부처님의 위신력을 모르는 자가 어리석게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면 그 결과는 괴로울 수밖에 없다. 우리들 마음 가운데 부처님 거울, 부처님이 계시기에 무엇하나 찍히지 않는 것이 없고 무엇 하나 씨앗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진정한 포교사는 항상 부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계시고 모든 것을 찍고 계시다는 생각에 투철한 삶을 살아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시주화주상봉’이라는 말이 있다. 시주의 공덕이나 화주의 공덕이 만난다고 하고 부처님 말씀 한마디 전하는 공덕이 항하사의 칠보로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고 하신 부처님 말씀을 음미해보라. 많은 불자들에게 끝없이 정진하고 그들로 하여금 불보살님께 시주하는 마음을 이끌어내는 화주공덕이 어찌 작은 일이겠는가. 공양미 삼백석에 목숨을 던진 심청이의 공덕에 심봉사가 눈을 떴다하듯 화주승의 공덕은 눈을 뜨게 한다. 진실여부는 차치하더라도 심청이의 맑은 마음이 하늘을 움직인 것이겠지만 그를 권유한 화주승의 공덕이 아니었다면 어찌 심봉사가 눈을 열었겠는가. 항상 부처님께서 내 마음 가운데 계시고 우주 무량한 법계는 해인삼매(海印三昧)의 위신력 가운데 계셔서 모든 것을 찍어대고 계시기에 부처님 말씀을 전하고 시주하게 만드는 공덕은 제불보살님께서 증명하신다.</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진정 포교사의 길은 항상 부처님을 내 마음 가운데 모시고 살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이 광활한 우주바다가 비로자나의 마음과 몸이라 생각하라. 비로자나의 가르침을 끊임없이 펼치고 계신 노사나불과 우주법계 곳곳마다에 몸을 나투어 법을 펼치시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무수한 성중들은 한 결 같이 해인삼매의 위신력을 바탕으로 화엄의 법륜을 항상 굴리고 계신다. 우주는 부처님 마음, 진리의 마음, 법의 거울이기에 우리의 모든 것을 항상 찍고 계심을 명심해야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2:00:20관리자초발심으로 돌아가 포교하고 정진하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18&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2.20 16:54 입력 발행호수 : 1126 호 / 발행일 : 2011-12-21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세월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우리가 사는 사회도 빠르게 변해간다. 변해가는 사회의 분위기와 함께 사람들의 삶의 자세도 변해간다. 갖가지 사회 제반 양상은 생물처럼 변해가고 있고 그들 중 가장 보수적인 조직이라 할 수 있는 종교도 피할 수 없이 변해가야만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IT산업의 등장과 더불어 변해가는 사회현상에 보조를 맞춰가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고 얘기들을 한다. 매스컴의 홍수에 불교의 세계는 얼마나 그 같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여타종교에 비교하더라도 불교의 변화는 그리 만족할만한 수준은 아닌듯하다. 종교도 시대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준엄한 사실을 제대로 직시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 듯하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30년 세월 포교를 하며 느낀 시대적 흐름 가운데 하나는 이 시대와 사회가 과학의 발달과 더불어 끊임없이 편한 것만을 추구하고 힘들이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 취하려한다는 사실이다. 그 탓으로 수행이라든가 기도라든가 법회라든가 하는 모임 등에 관심을 갖는 숫자가 크게 늘고 있지 않거나 줄고 있다는 것이다. 시대가 준 선물로 인해 컴퓨터 안에 모든 편리한 정보가 다 있는데 구태여 법당에 나올 필요가 있겠는가. 시간들이고 돈들이고 기름을 써가며 법당에 나와 법회를 듣거나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의미를 크게 절감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역력하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경제가 악화되고 기름값이 오르니까 기도의 숫자가 현저히 주는 추세다. 기름값이 부담돼서다. 또 대입수시라는 제도가 생겨 아무 때나 대학입학이 가능하기에 대입기도도 예전 같은 열기가 덜하다. 또 불교대학을 만들어 신도교육에 관심을 쏟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니까 다른 사찰에서도 유사한 교육이 생겨나 신도들의 이동이 많지 않아졌다. 이러한 상황이 벌어지는 가운데 포교가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많은 스님들이 고민한다. 진실로 아이디어를 짜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된 것 같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 결과 많은 광고료를 들이면서 시대의 총아인 매스컴광고에 열을 올리는 스님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 대충 이름이 떠다니는 스님들은 모두 TV나 라디오 등의 광고매체를 이용하는 스님들이 대부분이다. 많은 광고료를 써가며 광고를 해 반짝하다가 광고비가 어려워지면 어떻게 될까. 매스컴의 시대에 광고를 하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많은 광고료를 들여 광고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과연 들인 것만큼의 효과가 있고, 오래가겠는가. 얼마 안 되는 불교신자들을 이절 저절 떠다니게 하는 부평초 신도들을 만드는 건 아닌가. 광고가 새로운 신도들을 개발해 법당에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종교는 스테디한 측면과 트렌디한 측면이 있다. 꾸준히 정진하며 나가는 신도들을 양성해야한다. 바람을 불어 한탕하는 식의 포교는 바람이 불어왔다가 가는 것처럼 흘러갈 것이다. 내 경험상으로는 스테디하고 견실한 신도들을 만드는 것, 어떠한 어려움도 괴로움도 함께 웃고 울고 동고동락할 수 있는 쉽게 흔들리지 않는 신도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매스컴 광고를 이용한 포교는 그저 한순간 흘러가는 바람같이 이름만 허공을 맴돌다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한 때 잘나갔던 사람들은 스스로의 삶을 관조하기도 하고, 충전할 시간도 필요한 법이다. 그저 가만히 놓아두어도 굴러갈 수 있는 상황을 만들면 여유롭게 쉬었다 갈수도 있다. 광고를 통해 포교를 하고 매스컴을 통해 홍보를 하고자 한다면 불교의 힘, 가치를 부각시키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머리 깎고 스님이 될 때 유명해지려고 중이 됐던가. 매스컴을 타고 이름을 알려 각광을 받으려 스님이 됐던가. 부처님도 갖가지 고난 가운데 수행자로서 일생을 사셨고 타종교의 창교주들도 모진 고행과 핍박 끝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머리를 깎을 때의 초심이 과연 내 마음 가운데 살아있는가. 항상 머리를 만져보라 하지 않던가.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중방에 들어와 중물이 제대로 들어야한다 하신 큰스님들의 가르침처럼 중의 습의도 제대로 터득 못하고 중물도 제대로 들지 않은 사람들이 매스컴에 오르내리고 신문에 오르내릴 때마다 나같이 부족한 인간이 이 땅에 나와 부처님말씀을 전한다는 사실이 부끄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9:42관리자부처님 제자들의 포교원력을 배우자 /JiGwang/Gapi/Read.aspx?db_cnt=617&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2.14 14:41 입력 발행호수 : 1125 호 / 발행일 : 2011-12-14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전법사들이 따라야할 모범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부처님의 일생이 그러하지만 그에 앞서 부처님의 제자들의 구법 구도의 길, 포교의 길을 따르는 것이 우선일 것이다. 우리들은 부처님 제자들의 수행자상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항상 불교를 공부하고 연마하면서도 정작 부처님 당시 제자들의 수행자세와 구도행각, 포교를 위한 열정 등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흔히 나한들로 일컬어지는 부처님 제자들의 수행자상, 포교에 대한 원력 등은 우리가 따라 배워야만 할 규범중의 으뜸일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부처님 제자 가운데 상수제자였던 사리불의 예를 들어보자. 부처님을 따라 걸식을 한 뒤 포교를 마치고 기원정사로 돌아왔을 때 6군 비구들이 서로가 편하고 아늑한 침상과 이불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다툼을 할 때가 있었다. 그들은 예의도 도덕도 없이 장로 사리불의 침상마저 점거해버려 존자는 침상과 이불이 없었다. 그러나 사리불은 그들을 어여삐 여겨 큰나무 밑으로 가서 좌선을 하며 밤을 새우고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한밤중에 항상 그랬듯이 비구들의 휴식과 안전을 위해 순시하던 중 큰 나무 밑에 한 사람이 정좌해 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물었다.“그대는 누구인데 여기에 앉아 있느냐.”</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사리불입니다.”“사리불이여 왜 실내에서 편히 쉬지 않고 이런 나무 밑에서 밤을 새고 있는가.”“오, 부처님이시여! 오늘은 정사의 수행자들이 너무 많아 실내에서는 수행이 어렵기에 여기에서 수행하고 있습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두타제일 대가섭은 부처님을 떠나 구도와 포교를 위해 몸과 마음을 던졌으며 신통제일의 목련 존자는 부처님을 살해하려 끊임없이 달려들었던 데바닷다를 부처님의 명을 받아 지옥으로부터 구해내 부처님 제자를 만들었다. 카루다이 존자는 세속에서의 죄업을 참회하기위해 불타의 법을 전하기를 서원하였으며 불타의 법을 전해 죄업을 짓는 중생이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일심전력으로 포교에 몸을 바쳤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샤타나 존자는 속가에 있을 때 고기를 파는 장사꾼이었다. 장사를 하는 가운데 거짓말과 남을 속이는 일이 존자의 삶이었으며 생활의 전부였다. 공갈사기 행각 끝에 체포령이 내려져 도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도망자 생활에서 참회와 용서를 구할 방법을 찾던 중 부처님께 출가 할 수 있었다. 출가 후 “세상서 악행을 자행한 어떤 중생도 불법에 귀의토록 하고 불타의 게송을 외우는 사람들 모두 나의 신통력으로 악난과 재난에서 구해 불국토에 태어나게 하리라”고 서원했다. 그는 수많은 악한 사람들을 제도하고 불법을 홍포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했다. 부처님 제자들은 수행과 포교가 그들의 삶 전체였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만중생의 행복과 교화가 그들의 목표였다. 부루나 존자가 포교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지만 부처님의 제자들 모두 하나 같이 포교에 몸과 마음을 다바쳤다. 불타밀다 존자의 경우는 동인도의 어느 나라 왕을 제도하기 위해 붉은 깃발을 들고 1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인욕한 끝에 그 나라 왕을 제도하였고, 니건자란 당시 외도의 고수를 참회시켜 부처님 제자로 만들기도 하였다. 이들 모두 몸과 마음을 던지는 고행 끝에 포교의 대명사들이 되었으며 불법을 흥륭시키는데 혁혁한 공덕을 성취한 아라한들, 성중들이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말법시대 한국불교는 전통을 물려받아 관음신앙, 지장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포교사들에게 성중들의 삶을 이어받고 그들의 가피를 이어받는 성중기도가 의미를 가질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천수경’에도 ‘천룡중성동자호(天龍衆聖同慈護) 백천삼매돈훈수(白千三昧頓熏修)’라 하였고 나옹대화상도 “바라옵건데 천룡팔부 금강신장이시여, 도량을 수호하고 나의 몸을 보호하여 모든 재난을 소멸하고 하는 일에 장애 없길 지심으로 합장하고 간절히 기도 드리옵니다”고 하셨다.</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천룡팔부 금강신장님들께서 도량을 수호하시고 우리들의 몸을 옹호해주시며 갖가지 재난을 소멸시켜주시고 장애를 걷어내실 수 있는 위신력이 계심을 가르치셨다. 갖가지 마장장애와 어려움으로 점철돼 있는 현대! 부처님 제자들의 얼을 살리고 성중님들의 위신력을 힘입을 수 있는 성중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9:08관리자포교는 부처님 향한 한없는 사랑 이뤄가는 것 /JiGwang/Gapi/Read.aspx?db_cnt=616&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2.06 16:56 입력 발행호수 : 1124 호 / 발행일 : 2011-12-07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이론과 실제가 다르다’ 또는 ‘아는 것과 실천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다’라는 말들을 한다. 포교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말하기는 쉽고 듣기는 쉽지만 실제 얼마나 실적을 올릴 수 있는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교의 중요성을 얘기하지만 실제 얼마나 실속들이 있는지, 얼마나 실적이 있는지 의문이다. 포교 관계부서들과 각종 단체들이 열심히 노력들을 한다지만 불교인구가 늘고 있는가. 각종보고를 보면 생각해볼 점이 한둘이 아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여타 종교들은 교육시스템 자체가 수용자 즉 일반신도라거나 대중들을 사목할 수 있는 포교위주의 교육으로 짜여있다. 학교를 졸업하면 대중들을 상대로 목회내지는 강론을 해야만 하는 의무적인 존재를 키워낸다. 하나도 설교요 강론이며, 둘도 설교요 강론이다. 그들은 학교 입학부터 졸업까지 아니 일생동안 일반신도들의 사목내지는 교회발전을 위한 첨병들로 양성되어진다. 국내고 국외고 어디에서건 하나같이 포교의 전령사들로 키워지고 만들어진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들의 일생의 사명은 복음의 전파다. 다른 것은 부차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 세상 만방에 퍼뜨리는 확성기요, 마이크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자각하고 그를 수행한다. 그래야만 그의 인생의 보람과 발전이 가능하다. 그 외의 다른 어떤 내용도 우선될 것은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인재양성이 포교에 가장 중요한 과제라 할 때 우리 불교는 어떤가. 포교에 원력을 세운 몇몇 스님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아니고서는 이렇다 할 원조도 지원도 계획도 취약하기 그지없다. 그 누구를 비난하자는 게 아니다. 우선 포교인력을 양성하는 시스템을 제대로 짜고 그곳에서 육성되고 배출되는 포교사들에 대해 성장을 위한 노력과 관심을 기울여 제대로 된 포교사를 공급해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식과 정보로 무장된 현대인들에게 제대로 된 법문을 전달하지 않아서는 불교가 제대로 설자리가 없다. 생각해 보라. 절에 젊은 사람들이 얼마나 모여드는가. 젊은 세대에 애정과 사랑을 가지고 그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진 포교사들은 얼마나 되는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포교사들도 세월의 흐름 따라 단계적으로 성장해야한다. 사랑이 완성을 위한 노력이듯 말이다. 젊은 날의 사랑은 물질적인 성적인 사랑이지만 나이가 들면 부부는 정으로 산다고 한다. 남녀 간의 사랑뿐 아니라 인간적 정신적 사랑으로 진화한다. 남자와 남자끼리도 여자와 여자끼리도 인간적으로 우정이라거나 친근감 등의 인간적인 정신적 사랑이 있을 수 있지 않은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와 같은 사랑은 계속 진화해서 영원에 대한 사랑이라거나, 진리에 대한 사랑이라거나, 신에 대한 사랑이라거나, 부처님과 보살들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어진다. 사랑과 자비심이란 끝없는 성장을 통해 완전으로 나아가는 노력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조각을 하는 조각가나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모든 사랑을 쏟아 부어 완전한 작품을 만드는 것처럼 사랑은 완전을 향한 무한한 노력이다. 포교사의 길 역시 부처님을 향한 한없는 사랑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이다. 그 길이 바로 성불의 길 아니겠는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기적인 사랑이 이타적인 사랑으로 그리고 동체대비의 차원으로 성장하고 진화해야만 하는 것이 사랑의 길, 자비의 길, 포교의 길이다. 그와 같은 길을 일생에 걸쳐 나갈 수 있도록 육성하는 교육시스템이 제대로 정립돼야만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경쟁위주의 현대교육은 죽었다”고 말한 피어슨 같은 저명한 교육학자의 말대로 경쟁을 이긴 공부 잘하는 사람들보다 경쟁에 진 공부 못하는 사람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진정한 사랑의 포교사, 자비의 화신으로 성장하고 육성될 수 있는 교육시스템이 제대로 정립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관심과 사랑을 쏟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포교의 성공은 요원한 길이고 항상 공염불일 수밖에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항상 겉치레의 포교 가운데 그나마 원력보살들의 출현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8:07관리자사찰 특성 살린 포교전략을 세워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15&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1.30 17:55 입력 발행호수 : 1123 호 / 발행일 : 2011-11-30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인도에서 시작된 불교는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왔다. 불교를 우리나라에 전한 이는 중국이나 인도승려다. 그들의 치열한 포교정신이 불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게 했다. 이처럼 불교가 전파된 것은 모두가 부처님의 포교정신에 기반을 둔다. “떠나라, 만중생의 이익을 위해.” 이 한마디는 불교의 포교정신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웅변해준다. 부처님께서는 성도하신 후 열반에 드실 때까지 마가다국의 라자그리하와 코살라국의 사바티를 중심으로 전 인도를 향해 가르침을 펼쳤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입멸 후 십대제자 등에 의해 전교되던 불교는 아쇼카왕이 등장하면서 그리스, 이집트 등 외국에까지 전파됐다. 이때 중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 온 불교는 일본에 전달돼 나라 헤이안 카마쿠라를 거치면서 일본에도 뿌리를 내렸다. 모두가 불교의 포교정신에 바탕을 둔 스님들에 의해 전세계로 퍼졌다. 최근 들어 서양에서도 불교에 관심을 갖고 서양에 내재한 문제점들에 대한 해결책을 불교가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서구인들 가운데서도 동양의 불교국으로 유학해 승려가 되어 불교를 배우고 귀국해 포교활동을 전개하는 등 불교가 서양에 급속하게 전파되고 있다. 미국과 서유럽등지의 젊은이들 사이에도 불교가 유행처럼 퍼지고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처럼 불교는 인도를 넘어 세계로 퍼지고 있는데 한국불교는 외국은 고사하고 국내에서 조차 제대로 그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분명히 짚어내 포교의 활성화를 도모해야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른 포교의 주역은 아무래도 승가와 포교사 재가불자와 각종 포교단체들을 들 수 있다. 포교의 주역들이 맞이해야할 대상으로는 속계의 모든 중생들이며 교화의 주요 대상은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 불교를 믿더라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 불교를 믿는 사람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어린이, 청소년, 중장년, 여성, 노인 등이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외국인들도 그 대상에 넣어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전국 260여 시군구 지역 가운데 113개 정도의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불교가 열세 지역이며 지난 10년 동안 불교는 전반적으로 정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도심에 포교당을 건립하는 문제와 낙후지역에 대한 체계적인 포교가 절실한 실정이나 재원 등의 부족으로 이렇다할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매우 안타깝다. 불교에 대한 이미지를 향상시킨다든지 신도교육의 강화 내지는 조직화 등에 힘을 기울어야할 텐데 이 같은 작업 역시 만만한 일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일은 포교인력의 양성으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스님들을 육성하고, 재가신도들 가운데도 포교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특히 포교를 위해서는 올바른 포교방법의 채택이 대단히 중요하다. 도심과 농촌 등 지역적 차이가 있겠으나 과거의 재일법회 등과 더불어 자주 많이 만날 수 있도록 주말이나 주중법회의 활성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일요법회를 성공적으로 시행하지 못한다면 남자들을 법당으로 이끌어낼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가 어렵다. 남자들의 조력을 받지 못한 여성신도들은 운신(運身)의 폭이 넓을 수가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교회와 성당이 흥기한 이유는 일요일 예배라든가 모임을 통해 신앙을 가족화 할 수 있었기에 종교의 생활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남편, 아내, 아들, 딸들이 포교단체에 함께 모일 수 있는 유일한 날은 일요일이나 주말일 수밖에 없는데 일요일이나 주말법회를 제대로 활성화시키지 못하고 각종 재일 등의 법회로는 불자가정의 탄생을 도모하기가 어렵다. 종래 초하루 법회라든가 음력을 바탕으로 한 사찰 달력 등은 참여율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현대 들어 법회의 형식과 내용등도 현대적 방법이 채택되지 않고는 신도들을 제대로 유인할 수 없다. </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각종 기도재일뿐 아니라 재정의 확충을 위해서 다양한 법회양식의 개발도 필요한데 사찰마다의 특성을 바탕으로 각종 아이디어의 창출도 필요 할 것이다. 내가 아는 지방의 한 스님은 계절마다 야생화 축제라든지, 구절초축제라든지, 장류 등을 담아 제정 확충에 기여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각종 포교방법 등의 개발이 사찰마다 필요한 시대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7:28관리자불교 전통문화는 최상의 포교 방편 /JiGwang/Gapi/Read.aspx?db_cnt=614&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1.28 18:15 입력 발행호수 : 1122 호 / 발행일 : 2011-11-23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종교는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사회 속에서 성장한다. 중생이 없는 부처가 무슨 소용인가라는 얘기가 이를 대변한다. 부처님께서도 “떠나라. 만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고 말씀하셨다. 사회 속에서 태어난 종교는 당연히 사회를 잘 알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가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포교를 마케팅에 비유하는 학자들이 있다. 종교마케팅이란 말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상품 중심의 사회이다 보니 그렇게 말한다 해도 크게 어색하지는 않다. 대중들의 욕구(Needs)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마케팅이란 용어도 수용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문제는 종교라는 세계가 보수적인 측면이 강하고 특히 불교는 수행 중심의 체계를 갖고 있어 대중적인 포교라거나 사회성을 띠는데 여러 어려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또 교구본사라거나 사찰들의 입지가 외진 곳에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지역사회에서의 역할이 점차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상당수의 사찰들이 자연공원법 등 갖가지 법령에 묶여있어 활발한 종교활동을 펴기가 대단히 어려운 측면이 있다. 그 결과 사찰시설들은 낙후되고 골동품화되고 재정은 취약해지고 신도층은 점차 노령화되고 있다. 이 같은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안이 계속 연구되고 모색돼야 한다. 여타 종교시설들이 하나같이 대도시라든가 아파트단지 부근 신도시 등에 거점을 마련하고 뻗어나가고 있음에도 사찰들은 그에 보조를 맞추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대승불교를 표방하면서도 재정측면이 열악해 도심포교에 대단히 취약한 측면을 어떻게 보완해야할 것인가. 과제 중의 과제다. 도심의 아파트 단지 내 종교 부지를 개신교, 가톨릭이 싹쓸이를 하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 참으로 불교의 미래가 암담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 같은 어려움 가운데에도 불교의 긍정적 측면을 바탕으로 긍정적 발상을 통해 마케팅 전략을 세워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사실상 기존 사찰유지도 어려운 판에 도심포교당의 설립은 요원한 얘기일 수밖에 없다.</P> <P class=바탕글>우선 무엇보다 불교가 제대로 서려면 가지고 있는 전통문화유산에 대한 폭넓은 연구를 통해 불교문화를 대중화시킬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야만 한다. 우리 민족의 얼속에 녹아있는 전통을 오늘에 살릴 수 있는 문화 포교에 관심을 기울여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많은 개선점들이 얘기되고 있으나 템플스테이 등을 통한 한국불교문화의 얼을 소개한다든지, 연등행사 등 갖가지 불교행사를 통한 불교포교에 배전의 노력이 경주되고 있다. 21세기는 문화산업이 대단히 중요한 산업으로 부각될 것이라는 얘기대로 우리 불교만이 가지고 있는 문화의 대중화 등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다면 분명 좋은 아이디어가 창출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세계적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모두 불교적 소재들을 바탕으로 전개되고 있고 그를 통한 불교포교가 세계적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팔만대장경의 내용을 절묘하게 만화영화의 소재로 채택한 일본의 성공 예는 우리나라에서도 얼마든지 적용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서양에서의 만화영화는 하나같이 백설공주 등의 동화와 신화 등에서 이데아를 얻어온다고 하는데 불교는 무궁무진한 소재를 지닌 각종 문화산업의 보고라 할 수 있다. 그밖에도 그림, 조각, 음악, 무용, 건축 등을 연구해 보면 다양한 문화재 속에 스며들어 있는 전통의 얼이 얼마든지 대중화, 사회화 내지는 세계화 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리라는 생각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요즘 각광받고 있는 사찰음식의 예라든가 건강, 웰빙을 위한 각종 그린산업 등도 모두 불교를 빼놓고는 성립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다. 자연환경이 그대로 보존돼 있는 무공해 세계인 사찰의 환경친화적 내용을 사회에 전파할 수 있는 문화상품들에 대한 연구가 선행돼야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환경을 오염시키고 갖가지 음식쓰레기로 골병을 앓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절의 발우공양 등이 의미로운 문화로 부각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지 않는가.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또 일본의 대부분 사찰들이 그들의 사찰 내에서 흐르고 있는 물 등을 상품화시켜 사회에 공헌하고 있는 예들은 포교의 한 방편으로 연구대상이 아닌가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6:41관리자시대적 변화에 조응해야 성공할 수 있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13&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1.15 16:19 입력 발행호수 : 1121 호 / 발행일 : 2011-11-16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포교를 하려면 무엇보다 자기를 알고 상대를 알아야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얘기대로 우선 스스로를 알아야하고 상대방을 알아야하고 사회를 알아야한다. 스스로를 안다는 것, 자기를 제대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끊임없이 강조하신 이유 역시 스스로를 제대로 알게 하기 위해서였다. 깨달음을 통해 자신을 분명히 알게 되면 상대방을 알게 되고 사회를, 우주를 잘 알게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다 하나이기에 하나 속에 전체가 있고 전체가 하나 속에 들어있다” 하신 말씀 또한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대는 정녕 그대를 잘 알고 있는가. 나는 얼마나 나 자신을 잘 알고 있는가. 그리고 아는 것만큼 세상을 위해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것이 우리 불자의 화두요, 수행자의 목표가 아닌가. 화두는 선방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우리 모두의 삶속에, 매일의 삶속에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통해 항상 “너희들은 부처다”, “부처의 분신이다”고 외치셨다. 육조혜능도 “아직 깨닫지 못했다 하더라도 깨달은 자의 가르침 따라 실천하면 깨달은 자의 공덕과 무슨 차이가 있겠느냐”고 말씀하셨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어떤 이들은 깨친 다음에 중생제도를 해야지 깨닫지도 못한 이들이 무슨 중생제도냐 일갈하신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가르침을 들먹이면서 먼저 깨닫고 그 다음에 중생을 제도하라 얘기한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부처님처럼 깨달은 다음에 중생을 제도하려면 언제나 가능한 일인가. 부처님께서도 성불하실 때까지 무량겁에 걸쳐 끊임없이 중생교화와 중생제도를 멈추지 않으셨다. 끊임없이 수행과 전법으로 지혜와 복덕을 쌓아간 끝에 성불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를 일컬어 보살이라 부른다.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들을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영웅을 보살이라 말씀하셨다. 부처님 말씀대로 육조스님 말씀대로 스스로가 부처님의 분신으로 부처님의 아들, 딸로서의 사명을 분명히 자각하고 몸과 마음을 다해 뛰는 것이요, 깨달음을 닦아나가면서 끊임없이 난행·고행을 겪으면서 나가는 것이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대로 고통을 이겨내며 나가는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우리들의 종교환경도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10여년 전 종교세가 도입된 후 모든 사찰들이 점차 쇠퇴하고 어려운 상황을 연출하고 있다. 일본에 가서 일본스님들과 얘기를 나누는 가운데 처음 종교세가 도입될 때는 별것 아닐 줄 알았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커다란 족쇄가 되어 상당한 어려움을 겪고 있노라고 직접 들은 적이 있다. 우리나라도 그와 같은 상황으로 변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있는가. 교회나 성당이나 절 등에 세금을 물리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일본의 예처럼 된다면 종교환경은 더욱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는 해방 후 시대의 흐름을 타지 못해 갖가지로 종교·사회적 약자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개신교와 가톨릭이 폭발적으로 신장세를 보이고 있을 때 제대로 된 포교정책을 펼칠 수 없었다. 항상 탄압의 대상이었고 사회적 낙오자취급을 받은 예도 적지 않다. 스님들은 사회를 등지며 시작된 태생적 한계 때문에 또 다시 사회와 만나다는 것에 적지 않은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녕 21세기 한국 불교는 급변하는 사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선 앞날을 기약받기가 어렵다. 여러모로 포교활동이 위축되고 있고, 신도들도 자신에게 부여되는 종교적 의무이행에는 소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으며, 종교로부터 얻어내려는 반대급부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또 스님들이나 교역자들 역시 질적인 면에서 바람직한가 의문시되는 측면도 없지 않은 듯 여겨진다.</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불교의 성장을 위해 성장가도를 달리고 있는 여타 종교들을 살펴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으리라는 판단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불교의 큰 문제점으로서는 성직자 양성의 문제점, 조직체계의 취약성, 제대로 된 포교 시스템의 부재 등등 사회적 성장 가능성에 큰 도전을 받고 있다. 불교인들은 진정 사회를 제대로 알고 있는가.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6:09관리자언행이 법에 어긋남 없어야 신뢰가 형성된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12&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1.07 17:47 입력 발행호수 : 1120 호 / 발행일 : 2011-11-09</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십주비바사론’을 보면 설법자의 네 가지 덕이 나온다. 첫째 널리 보고 많이 배워 일체 언어장구에 걸림이 없어야한다. 박학다식을 말한 것이다. 둘째 세간과 출세간의 생멸상을 잘 알아야한다. 섯째 선정과 지혜를 얻어 경법에 대한 의심이 없어야한다. 넷째 더하지도 말고 덜하지도 말고 오직 말과 같이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 말씀을 잘 지키라는 말이다. 이 같은 네 가지 조건을 모두 갖춘 포교사가 얼마나 될까.</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문자를 버리라는 얘기를 거듭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포교에 어찌 문자가 필요치 않겠는가. 문자를 알면서도 문자에 걸림이 없어야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또 출가한 사람이 세속의 것들을 알아 무엇하겠느냐하며 세상사를 도외시하는 풍조가 없지 않지만 세상을 알지 못하고 어찌 세상을 구할 수 있겠는가. 선과 교의 갈등을 이겨내고 부처님의 길을 열어 갈 수 있는 포교사의 삶을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할 것이다. ‘양고승전’에는 법사의 4대 조건으로 성(聲), 변(辯), 재(才), 박(博)의 네 가지를 들었는데, 첫째 대중을 감동시킬만한 원만한 음성을 갖추어야한다는 것이고, 둘째 변은 때와 장소에 맞는 말이 되어야한다는 것이고, 셋째 재주가 출중해야하며, 넷째 박학다식하여 팔만사천의 법문을 펼칠 수 있는 학덕과 인품을 갖추어야 한다는 얘기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화엄경소’에도 법사 십덕을 얘기하고 있다. 일체 모든 법의 차별을 잘 알아야하고, 중생들을 위해 여래의 미묘한 법을 잘 펴서 말하는 것이며, 대중들 가운데에서 두려움이 없어야하고, 변재가 걸림 없어 일체법을 설하되 계속해 끊어짐이 없는 것이며, 근기를 따라 설하여 잘 알아듣게 하는 것이다. 또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말과 같이 닦고 행하되 중생의 마음을 어기지 않아 모두 함께 훌륭한 행을 닦게 하는 것이며, 위의를 법답게 하여 일거수일투족이 모두의 모범을 형성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모든 선법을 정진 습득하여 중생들의 마음 가운데 물러남이 없게 하는 것이며, 몸과 마음을 정숙히 하여 훌륭한 행을 닦고 항상 자비심을 일으켜 교화하되 게으르지 않는 것이고, 모든 인욕행을 닦고·익혀 타락 없는 법인의 힘을 성취하는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이와 같은 성취를 통해 성(聲), 변(辯), 행(行), 덕(德), 박학(博學), 재지(才智), 자비(慈悲), 도심(道心)의 여덟 가지를 법사의 여덟 가지 요건이라 하였다. 포교사의 길은 이처럼 요건이 많고 재주가 남다른 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어디에 가든 팔방미인이 되어 모든 사람들이 요구하는 점들을 나름대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러면서 그 가운데 자신의 수행을 키워 갈수 있는 참 수행자여야 한다. 포교사가 일신의 영달이나 세속, 애정에 몰두하면 부처님을 향한 의지가 소홀해져 그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크나큰 괴로움을 안기는 결과가 될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포교사는 부처님을 대신해 불법을 전하는 사람이다. 우선 자신을 위해 부처님 사상에 위배됨이 없어야하고 그 다음으로 중생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한다. 항상 자신이 어떻게 사람들에게 비쳐 보이는가를 생각해야하며 말과 행동에 항상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사람들은 말과 행동 그리고 생김새를 따라 그의 성품과 인격을 대강 점칠 수 있다. 인물이 덕성스럽고 자비스런 사람은 많은 사람을 구원하고 자기도 잘 살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대개는 자기도 망하고 남도 망치는 경우가 많다. 같은 물건도 예쁘고 튼튼하고 좋은 것은 잘 팔린다. 중생의 근기에 따라 지도자로서 행동하는 사람은 부처님처럼 32상 80호를 다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남의 웃음거리가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특히 포교사는 좋은 인상과 더불어 언어에 신경을 써야한다. 말을 잘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언어로 중생에게 이익과 즐거움을 줄 수 있어야한다. 말과 행동이 항상 하나여야 하는 것을 언행일치라 하듯 행동을 조심해야한다. 말만 잘하고 행이 따르지 않으면 “빛 좋은 개살구”라 하는 얘기를 듣기 쉽고 실없는 사람이란 얘기를 듣게 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법문을 듣는 것은 그를 통해 부처님의 행을 하여 지혜로운 삶을 열고 해탈열반의 길을 증득하자는 데 있다. 그렇기에 말과 행동이 어긋나면 훌륭한 법사의 길을 갈 수가 없다. 법사의 길은 갖추어야할 요건이 참으로 많은 길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5:32관리자제도할 중생 있기에 부처님도 존재하는 것 /JiGwang/Gapi/Read.aspx?db_cnt=611&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1.02 16:13 입력 발행호수 : 1119 호 / 발행일 : 2011-11-02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어리석은 이들은 부처나 신을 위해 중생이 존재하는 줄로 오판을 한다. 또 종단을 위해 교단을 위해 신도가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들을 하기도 한다. 부처가 중생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면 승려들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당연하지 않은가. 한나라의 대통령 역시 국민이 뽑은 지도자로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을 노예화하기 위한 존재는 아니다. 생사 속에서 열반을 증득한 부처도 선각자로서 중생을 건질 의무가 있는 존재다. 그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부처님을 받들면서 그 뜻을 펼치는 승가는 마땅히 중생의 의지처로서, 진리의 포교사로서의 책무를 수행할 뿐 어떤 권리를 행사할 특권적 존재가 아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승단의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여래의 의지를 펼쳐 보여 중생을 제도하는데 몸과 마음을 다해야 한다.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여래의 지견을 바르게 열어 보이는 것인가. 무엇보다 여래의 뜻에 계합하는 길은 미혹과 업장을 벗어나는 길이다. 무엇이 미혹이며 업장인가.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모르는 것이 첫 번째 미혹이며 영원의 행로를 제대로 모르는 것이 그 다음이며 인과를 부정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아무리 불교가 훌륭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믿고 따르며 실천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것은 하나의 골동품에 지나지 않는다. 부처님께서 “내가 열반한 뒤에 여러 제자들이 서로 법을 전하여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하면 여래의 법신이 멸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또 ‘법화경’에 “법을 전하는 자는 반드시 여래의 자리에 앉아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말을 하라”하셨다. 여래의 자리에 앉으라는 말씀은 그렇지 않을 경우 불청정(不淸淨)해지기 쉽고, 여래의 옷을 입지 않으면 추락하기 쉬우며, 여래의 말을 하지 아니하면 혹세무민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광란을 일으키게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법을 설할 때 대단히 주의해야 할 점은 자칫 잘못 전하거나 편견에 치우치고 사견에 떨어지면 적이 생기고 파당이 생기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법을 설한다하더라도 부처님의 지견이 아니라 자칫 자신의 그릇된 견해가 개입되면 의외의 문제가 생겨날 수도 있다. 신견, 변견, 사견, 견취견, 계금취견 등이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그릇된 지견이다. 몸의 노예가 되고 삼독의 포로가 될 경우를 ‘신견’이라 부르며 중도의 이치를 모르기에 ‘변견’이며 인과를 부정하기에 ‘사견’이고 자신의 보잘것없는 지견에 집착함에 ‘견취견’이고 자신이 고집하고 있는 계율, 율법에 빠져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함을 ‘계금취견’이라 부른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흐르는 물도 고이면 썩는 것처럼 불심도 흘러가다 막히면 병이 되는 수가 있다. 아무리 귀한 금쪽도 눈 속에 들어가면 병이 된다. 만상은 모두 부처님의 불신(佛身)이다. 부처님 말씀대로 만상의 제 가치, 제 본성을 제대로 깨닫게 하여 제대로 쓰게 하려는 것이 전법이요 포교다. 세상 모두가 부처님의 현신이기에 그들 모두에게 스스로의 본성이 부처임을 깨닫게 하는 것이 전법의 근본이다. 부처님께서 ‘법화경’ 방편품에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중생에게 여래의 지견을 열어 보여 깨달음의 세계에 들게 하기 위해서다”고 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오직 고통 속에 빠져있는 중생들에게 찬연한 여래의 지견을 열어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참다운 포교란 결국 무량중생들에게 그들 스스로의 본성을 깨닫게 하고 깨달음의 세계로 이끄는 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를 위해 진정한 포교사는 부처님께서 사해의 모든 동포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제도하셨듯이 모든 사람들에게 평등한 가운데 나와 남이 없는 도리로 법을 베풀어 어느 곳도 소홀함이 없어야한다. 그 누구에게도 치우침이 없는 마음가짐으로 무량중생들을 내 가슴에 안아 들이는 길이 진정한 포교사의 책무라 할 것이다. 우주에 편만해 있는 진리, 부처님 법을 갖가지 차별, 경계 속에 사는 고통중생들에게 그들의 근기 따라 펼쳐 보여 실현케 하는 일은 얼마나 숭고한가!</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의 마음가짐으로 중생이 없으면 부처가 무슨 필요인가하는 부처님 말씀을 여법하게 실천하는 영원한 보살의 길이 참된 포교사의 행로라 할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5:01관리자법사의 말과 행동은 부처님 것임을 명심하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10&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0.25 15:17 입력 발행호수 : 1118 호 / 발행일 : 2011-10-26</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세간에서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남아일구일언 중천금”이라고도 한다.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강조한 가르침이다. 여타종교에서는 복음을 전파한다고 하고 불교에서는 법음이라는 말을 쓴다. 부처님 말씀 한마디에 백만억 아승지겁에 받을 생사중죄가 소멸되고, 법사의 설법 한마디에 80만억 나유타겁동안 바라밀을 닦은 공덕의 천배 만배의 헤아릴 수 없는 뛰어난 공덕을 얻게 된다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따라서 부처님 말씀을 전하는 포교사들은 나는 얼마나 가치 있는 법문을 전하고 있는지를 스스로에게 항상 물어야한다. 법사의 법문 한마디에 법회는 격을 달리한다. 또 포교당이 일어나기도하고 쓰러지기도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말 한마디의 가치는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탁월한 인물들이 모두 한결같이 생명을 살리는 고귀한 가르침을 토로하는 것으로 세상을 진동시켰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 경전 가운데는 가르침의 의미, 법문 한마디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대목이 헤아릴 수 없이 등장한다.한 비구가 사람을 죽이고 전전긍긍하다 우바리 존자를 찾았다. 우바리 존자는 “참회진언을 하라. 다겁에 참회 불사를 하라”고 했다. 평안을 얻지 못한 비구는 다시 유마 거사를 찾았다. 유마 거사는 “그 죄를 나에게 다오. 그리하면 곧 그 죄를 태워 날려 버리리라”고 했다. 죄를 찾던 비구는 그 자리에서 ‘죄의 실다움 없는 이치’를 깨닫고 곧 해탈해 다겁의 고통을 한순간에 녹였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또 달마대사가 양무제에게 던진 ‘공덕 무(無)’ 법문도 한 마디로 상대방을 압도한 예다. 제자의 마음이 불안하다 할 때 “불안한 그 마음을 가져오라”는 한마디 가르침으로 혜가의 마음을 평안케 한 대목 역시 법문 한마디의 위력과 의미를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이들 선가의 어록들 모두 촌철의 한마디로 상대방을 깨우치려는 의미를 담고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나 현대인들에게는 좀 더 현실성 있고 다가설 수 있는 법문이 절실하다. 법문을 듣고 신심을 내는 것만으로도 공덕이 무량무한하며 불퇴전지에 나아간다는 가르침이나 설법을 듣고 기쁜 마음을 일으키기만 해도 4백만억 나유타 아승지 세계의 6도 중생들에게 으뜸가는 공양을 베풀어 주고, 다시 이들을 교화하여 아라한이 되게 한 복덕보다 크다 하신 가르침 등은 한결같이 법문의 중요성을 강조하신 대목이다. 한 사람만이라도 권하여 위대한 대승의 설법을 듣게 하여도, 보살로 나아가며 앉아 듣도록 자리만 권하여도 대범천왕, 제석천왕, 전륜성왕이 된다 하였으니 법사는 일체중생을 부처되게 할 뿐만아니라 아울러 보살과 천인인왕을 잉태하여 중요한 수확을 얻게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설법 한마디 한마디의 공덕이 이와 같이 무량한 것이어서 부처님 법을 전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마음 가운데 크나큰 불심으로 환희용약하는 법사의 길을 가야할 것이다. 포교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현애상’을 내지 말 것이며 스스로 ‘아상’도 내서는 아니될 것이다. 스스로의 약함을 보이는 법사를 중생들은 따르기가 쉽지 않을 것이고 자기를 너무 드러내는 경우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등을 돌리게 만들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법사의 길은 ‘금강경’의 가르침대로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이며 삼라만상 모두가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하는 마음가짐으로 부처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를 전하려 애써야 할 것이다. 법사의 길, 포교사의 길은 모든 것을 베풀며 펼치며 사는 길이고 모두를 던지며 사는 길이며 아낌없이 버리는 삶이어야 할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부처님 법대로 살며, 법 그대로를 실천하며, 법을 펼치는 가운데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부처님의 길 따라 걷다 부처님께서 부르시면 흔쾌히 떠나는 길이다. 법사가 머무는 곳은 그래서 그 어디나 법당이 되고 수행처가 되며, 법사는 언제 어느 곳에서든 부처님의 거룩한 뜻을 펼치는 존재여야만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세간에서 힘겨워하는 수행을 펼쳐나가며 모든 중생들의 의지처가 되는 것이 그들의 숙명인 것이다. 문자 그대로 법사의 한 마디, 한 마디 법문 속에는 부처님이 살아 숨 쉬는 존재로 있어야 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3:04관리자설법은 포교의 시작…항상 청중 먼저 생각하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09&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0.19 14:06 입력 발행호수 : 1117 호 / 발행일 : 2011-10-19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만유가 설법을 하고 있으나 사람의 설법은 말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없이 하는 설법도 있다. ‘백의관음무설설’이라 하는 가르침대로 말없는 가운데 무한의 법을 설하시는 불보살의 경우다. 그러나 포교사의 법문은 대체로 말로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을 해야 설법을 잘 하는 것인가. 나름대로의 연구를 해야 한다. 설법에 자신이 붙어야 포교가 제대로 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미국에서 조사한 연구결과를 하나 예로 들어 보자. 미국인들이 두려워하는 100가지 가운데 1위가 무엇인지 아는가. 죽음, 소송 등이 아니다.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이다. 미국과 한국의 차이는 얼마나 날까. 별반 다름이 없을 것으로 믿어진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든 자연스럽게 자기주장을 하는 듯 보이지만 내심 두려움과 긴장감을 느끼는 예가 많다. 포교를 위해서는 말하기의 장벽을 넘어야한다. 매일 얘기를 하고 사는 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물론 내용이 좋아야함은 선결요건이다. 그런데 설법을 할 때 먼저 유념해야할 일은 아무리 내용이 좋고 소재가 좋다하더라도 듣는 쪽이 관심을 기울이고 집중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설명을 할 때 포교사들은 대개 ‘무엇을 전할까, 어떤 이야기를 할까’를 먼저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이 같은 관점이 상대방을 지루하게 만드는 결정적 요인이다. 자신과 관계없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항상 설법 속에 자신이 포함되어있다고 느끼도록 해야 한다. 듣는 사람들과 공감대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상대를 움직일 수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유명한 교육학자 파크 파머는 “삶을 변화시킬 수 없는 가르침은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다”고 말했다. 설법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설법을 통해 삶의 변화가 있어야한다. 부처님께서 항상 말씀하셨듯 “나의 가르침은 추상적 이치에 있는 것이 아니요, 구체적이고 바른 행동에 있다”고 하셨다. 탁월한 설법은 항상 사람들을 동사형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그들은 느릿느릿 길게 흐릿하게 말하지 않는다. 탁월한 포교사의 동사형 설법을 듣는 순간 사람들은 적극적, 동적 인간이 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보살은 누구인가.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유정중생들을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영웅’이다. 보살이야말로 진정한 동적 인간의 전형이다. 설법을 할 때 나의 얘기가 상대방의 마음을 얼마나 움직일 수 있는가. 얼마나 동적인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가. 그 점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대체로 설법을 듣는 법우들의 반응을 들어보면 과연 어떤 설법을 해야 하는지 어느 정도 답을 얻어 낼 수 있다. 청중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면 대체로 듣는 사람, 상대방을 무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문 용어가 너무 많아 이해가 어렵다”면 어려운 불교 용어를 풀어서 얘기해야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 용어들은 모두 한자어로 된 것이 많아 처음 설법을 듣는 사람들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을 수밖에 없다. 가능한 한 듣는 사람들이 알아듣기 쉽게 해야 한다. 어느 경우에도 ‘무엇을 전할까’가 아니라 ‘어떤 말이 상대를 움직일 수 있는가’를 염두에 두어야한다. 상대가 충분히 귀를 기울여주고 올바르게 이해하고 기억에 남도록 하는 것, 그리고 듣고 나서 동적인 인간이 되도록 하는 것이 설법의 중요한 키포인트라 할 수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사람들 앞에서의 설법은 한 번에 많은 사람과 얘기할 수 있는 기회다. 설법은 자신의 생각을 단시간에 전달하여 많은 사람들을 움직일 수 있고 효율적으로 대중들을 통합시키고 긍정적인 방향과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반대로 실패하면 많은 이들을 실망시키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정적 평가를 받게 된다.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이라 할 수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제대로 설법을 할 수 있으면 대중들 가운데 평가와 지명도가 올라간다. 당당히 설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은 사람들을 동적인 인간으로 만들고 그들의 삶에 강한 변화와 충격을 가져올 수 있다. 설법을 잘 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것은 자신이 법력과 실력을 부각 시킬 수 있는 중대한 열쇠를 잡는 것과 마찬가지다. 항상 듣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그들이 좋아할 설법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52:08관리자씨앗도 심지 않고 수확을 바랄 순 없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08&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0.11 14:54 입력 발행호수 : 1116 호 / 발행일 : 2011-10-12 </P> <P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모든 일이 다 그렇듯, 시작할 때 마음같이 순조롭게 진행되는 경우는 많이 없다. 포교의 길도 예외가 아니다. 부처님을 만들어나가는 중대한 작업이라 훨씬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쉽사리 시작했을지라도 가는 길은 대단히 험난하다. 끝없이 기도를 강조하는 이유는 힘겹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의지할 분은 부처님 밖에 아니 계시기 때문이다. 기도하면 할수록, 정진하면 할수록 강해지지 않은가. 나아갈 방향을 몰라 안타깝기만 할 때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본 사람은 부처님의 위신력을 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포교의 길, 인생의 길 가운데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은 다반사로 일어난다. 내 경우 빌딩 한 귀퉁이를 얻어 지금까지 올 수 있었는데, 이는 대단히 희소한 경우에 속한다. 사람들을 상대로 하는 포교는 사람들 자체가 예측불허의 존재이기에 앞날 역시 예측불허다. 부처님만이 모든 것을 알고 이끌어주실 수 있기에 ‘오로지 부처님께 맡깁니다’라는 마음가짐으로 부처님을 열심히 불러 모시며 나갈 수밖에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인생행로는 진정 얼마나 미지수인가. 미래는 또 얼마나 불확실한가. 괴테는 인생행로를 “안개 속(I’m Nebel)”이라 불렀다. 안개 속을 헤맬 때 어떻게 하는가. 다른 방법이 없다. 관세음보살, 부처님을 불러 모실 수밖에. 너무도 괴롭고 힘들 때 승복을 몇 번씩 찢어버렸던 날도 있었고 그보다 더한 날도 많았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윌리엄 카우스 스탠포드대 교수가 미국 백대 기업 CEO들에게 앙케이트를 실시한 결과 과거 자살의 충동을 느꼈던 사람들이 94%에 달했다는 통계를 내 놓은 적이 있다. 미국의 탁월한 CEO들이 아무렇게나 되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백히 알 수 있는 증거다. 그렇다, 다른 모든 일과 마찬가지로 포교의 길도 부처님의 길처럼, 부루나의 길처럼 생명을 거는 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출발 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중도하차가 다반사일 수밖에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진실로 한국불교는 포교의 전사를 키워내야 한다. 강인한 의지와 기도 정진으로 뭉친 포교의 전사가 아니고서는 앞길을 헤쳐 나갈 수가 없다. 여타 종교들에서 행하고 있는 교역자 양성시스템은 우리 불교와는 한마디로 비교가 되지 않는다. 그들이 교역자 교육과정을 통해 목적으로 하는 것은 오로지 선교와 복음의 전파다. 불교대학들에서 배출하는 인재들은 포교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적응하고 있을까. 저들은 사막에 갖다 놓아도 살 수 있도록 가르치고 키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우리 불교는 어떤가. 포교는 남이나 하는 일이고 나하고는 상관없는 일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승단 관계 인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불교도 꼭 그렇게 하자는 게 아니다. “포교하자. 포교가 중요하다” 떠들 일이 아니고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교육과 포교 시스템을 짜라는 것이다. 끝없이 불교가 위축되고 고통 받는 사례들이 교계신문들에 항상 보도 되고 있는데도 효율적인 대책 하나 마련한 것을 보지 못했다. 오래전부터 포교는 언제나 찬밥신세인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내가 포교를 시작했던 25년 전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장학금을 주며 많은 스님들을 지켜봤지만 대부분의 스님들이 포교에 무관심한 듯 느껴졌다. 여건 탓을 하겠지만 생사를 걸었던 부루나존자 같은 의지의 화신들을 별로 만나 본적이 없다. 항상 하는 얘기지만 투철한 신념 없이 포교의 성공은 불가능하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미친 듯이 부처님을 불러 모시고 나가는 의지의 화신이 아니고서는 이 척박한 포교의 토양 가운데서 제대로 자라나기가 절대로 쉽지 않다. 상황도 나쁘고 포교에의 투철한 의지조차 박약한데 불교의 앞날에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불교의 미래를 생각해보면 한숨이 절로 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러나 조선시대 오백년을 이겨 나온 불교가 망하기야 하겠나하는 일말의 자위로 산다. 어려웠던 조선시대 스님들이 승군에 몸을 던졌던 의지가 새삼 그립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o:p></o:p>2012-03-07 오후 1:51:28관리자포교는 사부대중 공동의 몫이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07&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10.06 17:22 입력 발행호수 : 1115 호 / 발행일 : 2011-10-05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지금껏 만나온 스님들 가운데 불교대학 졸업 후 무얼 할거냐 물으면 대부분 “선방 가야죠”라고 대답한다. 한국 스님들에게 포교는 항상 2순위, 3순위다. 포교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P> <P class=바탕글>개신교계는 이미 포화상태가 된 한반도이기에 신학대학 졸업생들에게 해외포교를 적극 권장한다. 강제는 아니지만 꼭 필요한 사람만 국내에 남아있고 그렇지 않을 경우 해외에 눈을 돌리라 권장한다. 그래서인지 현재까지 수만명이 해외에 파견돼 미국에 이어 세계 제2 선교사 파견국이 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국내에서 선교를 하다 안 되면 개척교회를 하고, 택시운전까지도 불사하는 신학대학 졸업생들이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들은 절박한 상황에 배수진을 치고 선교를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가톨릭의 경우는 좀 다르다. 그들은 굳이 어떤 성당, 어떤 신부를 특별히 키울 이유가 없다. 바티칸이 그들의 주인이고 계급에 따라 올라가면 된다. 포교에 전심전력 할 이유가 있을까. 관리비용을 빼고는 모두가 바티칸으로 간다는 얘기가 있는데 사실인지는 모르겠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반면 개신교는 스스로 독자적으로 서야만 하고 너무도 많은 졸업생이 매년 쏟아져 나오기에 목사 취직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서울 사대문 내 교회라든가. 강남 유수의 교회 부목사로 취직되기가 대단히 어려울 뿐 아니라 상당한 능력을 갖춘 목사님이 아니면 졸업 후 취직도 어렵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니 점차 식어가는 개신교에 대한 열기 등 여러가지로 압박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으리라. 그 결과 종교간 갈등을 초래하는 갖가지 사례들이 여기저기서 생겨나고 있다. 특히 장로 대통령들이 등장하고 정치인들 가운데 압도적인 수가 개신교 계통의 인사들로 알려지면서 이 나라가 이제는 완연히 개신교, 기독교의 나라가 됐구나하는 위기의식을 느끼는 불교인들이 많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에 반해 스님들의 경우는 너무도 여유만만하다. 학교를 졸업하면 선방이 기다리고 있다. 포교에 뜻을 두다 제대로 안되면 부전을 살거나, 그도 안 되면 다시 선방에 방부를 들이면 되니까 포교에 대한 절박함이 없다. 여타 종교에서는 배수진을 치고 달려드는데 여유작작한 불교의 앞날은 과연 어떨까. 즐비한 국보가 자리하고 있고 천년고찰들이 위용을 자랑하는 한 불교가 망할 리가 있겠는가하는 분들이 계신다. 나도 그 같은 취지에 동감이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에 가 본적 있는가. 세느강변의 그 유명한 노틀담대성당에 가 본적이 있는가. 그 유서 깊은 대성당은 언제부터인가 신도들보다 관광객이 더 많은 성지가 되었다. 서양은 성당, 교회가 문을 닫거나 팔려고 내놓은 곳이 수도 없다. 우리네는 고찰들을 팔려고 내놓을 수는 없으리라.</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러나 점차 그곳을 찾는 신도들의 수가 줄어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통계에 보면 20대의 태반이 독자라는 얘기도 있다. 이미 스님이 되려하는 숫자가 격감하고 있고 비구니 스님은 심각한 수준이라고 들었다. 이 같은 상황이 계속되면 조계종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될까. 지금 기득권을 잡고 있는 승려들에게는 상관이 없다. 10년 뒤, 20년 뒤 불교가 문제다. 참으로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변화가 오지 않는 한 한국불교의 미래는 장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절방은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사부대중, 비구니,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의 체제를 인정한다면 재가포교사 제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 스님들 위주의 승단이 아니라. 재가자, 포교사, 법사들의 양성에 배전(倍前)의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독신승은 독신승대로 가고 재가자, 포교사, 법사들을 대폭 받아들여 그들의 영역을 확보해 주어야한다. 그래야 경쟁도 되고 불교 포교도 더욱 더 활성화 될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래서 그와 같은 목적 하에 대학을 만들려하는 것이다. 내가 만든 대학에서는 스님들과 재가자들을 모셔서 오로지 수행과 정진, 포교에만 매진할 수 있도록 공부시켜 전국, 전 세계로 배출할 것이다. 오로지 포교에 몸과 마음을 던질 사부대중들을 모셔서 피눈물 나는 정진을 거듭할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2012-03-07 오후 1:50:42관리자무한한 감동만이 전법을 성공으로 이끈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06&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9.27 17:48 입력 발행호수 : 1114 호 / 발행일 : 2011-09-28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종교를 선택한다는 것은 인생의 나침반을 선정한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인생 방향타의 선택은 얼마나 중요한가. 종교를 어머니, 아버지, 조상님들로부터 자연스레 물려받은 경우는 크게 얘깃거리가 될 게 없다. 그러나 종교가 없던 사람이 또는 타종교인이 개종을 한다거나 종교를 선택한다 할 경우 그들의 선택은 신중할 수밖에 없다. 종교사회학에서는 물질 만능의 현대 사회에 들어서면서 탈종교적인 분위기가 세계를 풍미하고 있다고 말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미국이나 유럽도 그런 분위기가 지배적이라 듣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어떠한가. 타종교가 어려워서인지 불교가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개신교와의 갈등 양상이 점차 심화돼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개신교 신자가 줄고 있다는 보도를 보면 이 땅에도 탈종교 바람이 불고 있는 듯 여겨진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의 포교는 더욱 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종교를 가지려는 사람들이 “왜 하필이면 불교인가?” 물을 경우 그에 적절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백화점의 물건처럼 많은 여러 종교들 가운데 불교를 선택해야만 될 이유를 자신 있게 설명할 수 있는가. 부처님께서도 우발리 존자에게 굳이 개종할 마음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달라이라마도 말끝마다 굳이 개종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한다. 또 얼마 전 발표된 ‘아쇼카 선언’에서도 굳이 개종을 강요할 필요가 없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는 보도를 본 적이 있다. 이 같은 상황 하에서 어떻게 포교를 해야 하는가, 물어오는 스님들이 있다. 그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어느 선생님께 들은 얘기다. 수십 년 교편을 잡고 살아오는 가운데 대부분의 우수한 학생들의 부모들은 절대로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 강요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아이들이 우수해서도 그렇겠지만 아이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항상 대화를 통해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를 잘 깨닫게 한다. 아이들은 부모의 얘기를 듣고 충분히 깨달음을 얻고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하는 자세를 견지한다. 공부는 강요로 되는 것이 아니다. 스스로의 마음 가운데 동기유발이 참으로 중요하구나 하는 것을 항상 느낀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식으로 말한다면 마음 가운데 발심을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믿어라 믿어라” 강요해서 어느 정도 효과는 있겠지만 충분히 설명해 주고 스스로가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도록 유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시대가 많이 바뀌어 강요한다고 믿는 세상은 지나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기독교인이건 가톨릭을 믿건 와서 들어보자, 공부해보자, 함께 토론하고 얘기해 보자, 이렇게 유도하는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판단은 스스로가 내리는 것. 믿고 안 믿고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것이다. 개종하라 말라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스스로가 공부해 보고 설득력 있고 믿어지면 믿을 것이다. 부처님께서도 끝없이 법문을 설하시지 않으셨던가. 그리고 끝없이 질문을 받고 또 설명하시지 않으셨던가. 대표적으로 ‘금강경’을 보라. “수보리야, 네 생각이 어떠하냐”고 항상 물으시고 또 대답하시곤 하지 않으셨던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공부하라 말라, 개종하라 말라, 믿어라 말라” 강요할 이유가 없다. 그저 끝없이 얘기하라. 가르쳐라. 펼쳐라. 최선을 다해 정성을 다해 깨닫도록 유도하라. 깨달음이 없는 곳에 관점의 변화, 마음의 변화가 올 리 만무한 법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부처님께서도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법을 설하라 하셨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다. 그들이 진실로 믿고 싶도록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는가. 그만한 실력과 수행력을 갖추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라.포교가 어려운 점은 그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것이고 그들의 마음을 부처님을 향해 나가게 하는 것이다. 믿고 싶도록 동기 유발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과 수행력의 문제다. 공부하라 말라, 할 것이 아니라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설득력 있게 얘기할 일이다. </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사랑해 달라 말라, 구걸할 일이 아니고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개종하라, 믿어라, 강요할 일이 아니라 얼마나 그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9:58관리자대중의 언어로 법문해야 포교도 가능하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05&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9.20 15:28 입력 발행호수 : 1113 호 / 발행일 : 2011-09-21</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포교를 얘기할 때 설법이라는 말도 함께 쓰게 된다. 부처님의 설법 양식을 모델로 하는 것이 가장 훌륭한 포교 방법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포교에 굳이 방법론을 따질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얘기를 하시는 분들도 계신다. 효과적인 포교를 위해 부처님께서 즐겨 쓰신 설법의 양식을 생각해 보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부처님은 찾아온 사람들만을 제도하고 포교하신 분이 아니다. 직접 중생들을 찾아 나서 적극적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신 분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나도 우루벨라의 장군 마을로 가련다” 하신 포교선언대로 끝없이 걸어다니신 분이시다. 또 대상자의 근기와 능력에 따라 그에 부합한 내용을 설하셨다. ‘응병여약’이라 하듯이 스스로를 의사에 비유하고 중생들을 환자로 생각해 약을 처방하는 방식으로 법을 설하셨다. 부처님의 포교 성공요인을 굳이 들라면 케이스 바이 케이스의 근기설법을 펼치셨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부처님께서 당초 깨달음을 얻으신 즉시 열반에 드시려했으나 범천의 간청으로 설법하시게 되셨다하시면서 중생들의 근기를 살펴보셨다하는 경전의 내용이 등장한다. 성도직후 설법을 하실 것인가 말 것인가 심사숙고하시다가 가르쳐주면 깨우칠 자들이 있고, 중생들 각자 근기의 차별이 있음을 관찰하셨다고 경전은 밝히고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대기설법을 흔히 수기설법, 방편설법이라고도 하는데 방편설법에는 인연이나 비유들의 다양한 방법들이 사용되고 있다. ‘법화경’ 방편품을 보면 “내가 성도한 이래 종종의 인연이나 종종의 비유로 널리 연설한 교법은 무수한 방편으로 중생을 인도하여 집착을 여의게 하고자 함이다”고 말씀하셨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연꽃이 수중에 피어있거나 수상에 피어있는 것처럼 각각 근기의 차별이 있음을 관찰하신 부처님께서는 탁월한 비유와 인연설로 무량중생들을 깨치신 것이다. “비구들이여, 눈 먼 거북이가 백년에 한번씩 떠올라 구멍이 있는 궤짝에 머리를 집어넣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어리석은 자가 사람의 몸을 얻는 일일 것이다.” 이와 같은 비유뿐 아니라 ‘법화경’ 등 갖가지 경들의 비유 등은 참으로 통찰력 깊은 관찰과 지혜의 소산으로 포교와 설법을 얘기 할 때 과연 어떠한 법문을 펼쳐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게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삼라만상의 전개를 인연과 비유로 설명하시는 가운데 펼치신 인과의 법문은 설법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 볼 수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양상은 인과의 도리따라 전개된다” 말씀하시면서 중생세계의 모든 난해한 문제들이 인과의 표현임을 낱낱이 밝히셨다. “네 배를 타고 어떤 아기가 들어올지 너는 아는가, 그저 좋은 아기 낳게 해 달라 기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뱃속에서 나오면 내 아들, 딸이라 하지만 어떤 아이가 들어올지 그 누가 아는가. 어떤 아내를 어떤 남편을 만나게 될지 아는가.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 기도만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반대의 사람을 만나게 될지 그 누가 알 수 있는가. 모두가 하나 같이 모르는 것들뿐이다. 그와 같이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만상은 법따라 전개된다”고 하셨다. 그 법이 무슨 법인가. 인연법이요 인과법이다. 모름지기 좋은 인연과 인과를 원하는 자는 법따라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다. 인과와 인연의 도리를 만상의 근원이라 말씀하신 도리를 이해해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설법의 가장 중요한 요체는 과연 어떠한 방법으로 듣는 사람들을 깨닫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가장 설득력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 때마다 부처님의 설법양식을 항상 곱씹어 보라. 부처님의 설법 가운데 모든 포교의 핵심이 들어 있다는 점을 부정할 자가 누구인가. 항상 경전의 전개 양식을 음미해보라. 그를 바탕으로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맞춰 설법을 짜나가야 할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일방통행식의 얘기는 듣는 사람들의 포괄적 이해를 구하기 어렵다. 너무 어려워도 안 되고 너무 세속으로 끌어내려도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설법·포교의 세계다. 항상 듣는 사람과 하나 된 도리로 그들의 근기에 맞게 할 수 있는 설법이 될 때 그들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 </P> <P class=바탕글>부처님께서는 앉아서 중생들을 맞아들이신 것이 아니라 중생들 속을 헤집고 다니시면서 그들의 근기에 맞게 대기설법, 방편설법을 펼치셨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할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9:20관리자불자들을 신심과 정진의 화신으로 무장시켜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04&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9.14 18:16 입력 발행호수 : 1112 호 / 발행일 : 2011-09-14</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우리는 성불의 그날까지 얼마나 많은 지옥을 거쳐야 하는가. 부처님께서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악마와 싸우셨다. 하물며 미물중생인 우리들은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세월을 악도를 거치며 살아야할까. 과거 여론조사에 의하면 불자의 50.9%가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해서 절에 다닌다고 했다. 물론 고달프고 가파른 인생길에서 마음의 평안을 위해서 절에 나온다는 대답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불교는 그 같은 차원을 넘어 신도들을 좀 더 용기 있고 강하게 연단해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를 흔히 구도의 종교라 하지 않는가. 구도자의 행로가 마냥 편하기만 한 것인가. 성불의 길, 깨달음의 길은 대단히 치열하다. 마음의 평안을 위해 절에 나온다지만 우리네 삶은 본질적으로 갖가지 고통을 극복하야만하는 투쟁의 마당 아닌가. 부처님께서도 위대한 보살의 길을 “위대한 용기와 신심을 바탕으로 모든 중생들을 열반의 세계로 이끄는 영웅”이라 하지 않으셨던가. 위대한 용기가 보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며 영웅의 길이 바로 보살의 길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마음의 평안을 위한 길도 그중의 하나겠지만 몸과 마음을 불사르며 나를 버린 위대한 전사의 길이 아니겠는가. 부루나의 길이 몸을 던진 길이었듯이 불자의 길 특히 포교사의 길은 좀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이며 용기 있는 영웅의 길이어야 한다. 불교를 처음 믿는 사람이라면 마음의 평안이라거나 마음의 위안을 얻으려는 자세를 탓할 수만은 없다. 그러나 부처님 가르침을 몸과 마음을 다해 연마한 불자들은 무량중생들을 위한 살신성인의 자세여야 한다.최근 들어 포교에 관한 얘기를 할라치면 등장하는 몇몇의 포교당들이 종단이라든가 어떤 특정한 단체의 지원으로 커나간 곳이 있던가. 하나 같이 특정한 승려들의 개인적 원력이나 노력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누구에 의지해 커나간 곳은 한군데도 없다. 모두가 투철한 개인의 원력에 따라 시작했고 성장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할 것이 있다. 개인적 원력을 바탕으로 한 포교를 통해 신도들을 양성했다지만 과연 그 신도들이 얼마나 수행자 정신과 호법의 의지가 강한가의 문제이다. 그저 마음의 평안을 위해 법당에 나오는 정도의 신도자라면 기존의 신도들과 무엇이 다를 바 있겠는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서구종교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은 십자군을 만들어 천년에 걸쳐 처절한 전쟁을 벌였다. 상대종교인 이슬람 역시 출발당시부터 전쟁, 특히 성전(지하드)을 통해 성장했다. 양대 종교의 싸움은 인류의 역사를 피로 물들였다. 모든 전쟁의 상당부분이 종교전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불교는 열외로 친다하더라도 현대 한국의 종교상황은 또 어떤가. 불교는 항상 터지는 종교다. 조직도 안돼 있고, 신도들은 반수이상이 그저 마음의 평안만을 구하려고 절에 나온다. 전혀 호법의 의지가 박약하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절에 다니는 신도들은 그저 선하고 여리다는 평을 듣는다. 항상 핍박받으면서 가슴앓이하는 종교가 불교다. 나라의 위정자들의 다수가 개신교고 가톨릭인데 “나는 불자요”라고 나서는 정치인들을 제대로 본적이 있는가. 스님네들이 신도들을 강하게 단련시키지 못해서이다. 스님들이여 포교사들이여! 신도들을 강하게 단련시키라. 기독교나 여타 종교에서와 같게는 아니더라도 위대한 영웅을 만들어야한다. 자신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는 내적인 투쟁에 강하고 외적인 종교적 갈등상황에서도 강하게 맞닥뜨릴 수 있는 불자들의 힘을 길러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님들의 역량이 절실하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내적으로 외적으로 강한 힘을 키워야한다. 신도들을 강한 보살정신으로 단련시켜야 한다. 위대한 영웅의 길을 걷게 해야 한다. 불교는 여러모로 너무 약하다. 기독교정신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언론매체들이 갖가지로 알게 모르게 포교에 앞장서고 있는데 불교포교 매체는 대단히 취약하고 신도들도 전혀 조직화되지 못하고 강한 보살정신으로 무장돼 있지도 않다. 누구의 잘못인가.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무엇이 잘못돼 있는가. 그저 편하자고 믿는 불자를 초보단계의 불자라 한다면 그들을 계속 단련시키고 강하게 단련해 위대한 용기의 화신,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포교사와 스님들의 중요한 몫 아니겠는가.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8:36관리자성자는 어떤 상황에도 모두를 하나로 만든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03&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9.06 09:54 입력 발행호수 : 1111 호 / 발행일 : 2011-09-07</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삼성의 총수가 “자칫하면 삼성도 십년 내에 구멍가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사람들은 그 말의 참뜻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괜히 엄살을 떠는 얘기라거나 직원들을 겁주려고 한 얘기가 아닌가 생각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삼성을 능가하는 대기업 노키아를 잘 알 것이다. 얼마 전 보도를 보면 노키아가 시대흐름을 잘못 읽어 존망의 기로에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다. 참으로 엄청난 얘기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한순간 아차하면 순간에 나락에 떨어질 수 있음을 수많은 기업의 흥망사를 보면 알 수가 있다. 조그만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고민이 거대 기업 총수들을 짓누르고 있는 것이다. 커진다는 것은 그 만큼 크나큰 문제와 만나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우리는 성불할 때까지 얼마나 많은 지옥을 드나들어야할까. 커지면 커지는 대로 더 커질 수밖에 없는 장애물과 저항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라.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금강경’에도 “무아의 길을 가려면 얼마나 많은 참음의 날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라”고 가르친다. 생각해 보라. 부처님은 성불을 위해 왕국도 버리고 아내도 자식도 모든 것을 버렸다. 그런데 그대는 얼마나 버릴 수 있는가. 내주머니의 한 푼도 버리고 베풀기에 아까움을 느끼지 않는가. 부처님의 버림에 이를 때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집착의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야만 하는가. 내 호주머니에서 나와 남에게 주어질 때까지 얼마나 많은 장애가 나를 괴롭히는가. 베푸는 단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고통은 또 얼마나 큰가. 평범한 중생들이 느끼는 고통의 단위와 삼성의 총수, 나라의 대통령이 느끼는 고통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사람들은 권력자나 재벌 총수들을 부러워 할지 모르나 그들이 누리는 권력만큼 책임과 의무 또한 대단히 무겁고 고통스럽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 같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참으로 오랜 과거 생에 갈고 닦지 않았다면 엄청난 고통과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그릇을 과연 키울 수 있었을까. 그래서 나랏님은 하늘이 낸다고 하고, 큰 부자도 하늘이 낸다고 하는 게 아니겠는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포교에 큰 뜻을 둔 사람들은 이 같은 점을 분명히 유념하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한 끝없는 기도와 정진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기도를 강조하고 법을 연마해야만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는가. 광활한 우주는 부처님 말씀대로 우주적 정의가 지배하고 있다. 우주적 정의의 위신력은 과연 어떤 것일까. 우주적 정의는 분열을 거부한다. 분열주의나 편협성의 장벽은 중생세계요. 우주의식은 이들을 무너뜨리고 통일의 무서운 위신력을 발휘한다. 나랏님이나 재벌이나 탁월한 인물들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은 그 모든 저항을 이겨내고 하나로 만드는 통합성과 통일력에 있어 탁월하다. 그들은 모두를 하나로 만드는 위대한 통일의 힘을 발휘한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위대한 성자들은 사랑과 자비를 바탕으로 갖가지 장애물을 걷어내고 모두들 하나로 만들었다. 그들은 무서운 수행력을 바탕으로 장애를 걷어내며 통일의 힘을 발휘했다. 그들의 통일의 힘은 우주적 정의와 하나된 가운데 나왔다, 대제국을 건설한 사람들도 행로가 다르긴 했지만 대의명분이나 정의를 앞세웠다. 불의를 타도한다는 명분으로 혼돈을 걷어내며 통일해 나갔다. 결국 나랏님이나 재벌 총수나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그 힘의 원천은 통일력이고, 그 힘은 결국 우주적 정의와 얼마나 합치된 삶이었던가에 매달려 있는 것이다. 이렇듯 우주적 정의는 모든 혼돈과 장애를 걷어낸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오랜 세월 버리고 비우면서 살아오신 끝에 부처님도 되고 전륜성왕도 되는 것이다. 문제는 과연 얼마나 버리고 비울 수 있는 힘이 가능할 것인가. 그 힘을 얼마나 양성할 수 있는가가 포교문제의 가장 중요한 바로미터라 할 수 있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정진하는 사람, 자신을 등불로 삼고 법을 등불로 삼고 기도 정진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 갖가지 저항과 장애를 걷어내며 통일의 힘을 끝없이 배양하는 사람만이 포교전선의 승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7:25관리자고난이 큰 만큼 성불에 가까워 진다 /JiGwang/Gapi/Read.aspx?db_cnt=602&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8.30 15:23 입력 발행호수 : 1110 호 / 발행일 : 2011-08-31 </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삼세제불보살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성불의 길은 무한고행의 길이다. 중도란 가르침 역시 과도하지 않은 수행과 고행의 뜻을 담고 있다. 거문고의 비유가 그를 대변한다. 결국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고행한 자가, 수행한 자가 성불의 길을 앞당길 수 있다. 수행을 열심히 하면 할수록 고행을 극복하면 할수록 부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다. 편안하려하지 말라. 공덕을 까먹는다. 몸과 마음을 다해 항상 갈고 닦으라하신 부처님 말씀을 명심해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생각은 명확히 물질임을 알라. 자기가 갈고 닦은 만큼의 작품이 나온다. 고행한 만큼 수행한 만큼 능력이 배양된다. 포교에 몸을 던진 자는 그래서 몸과 마음을 다해 정진해야한다. 갖가지 고행과 난행을 이겨낸 만큼의 말과 생각과 행동이 나온다. 갈고 닦은 것만큼의 법문이 흘러나온다. 포교사의 법문 가치는 그의 고행, 난행 만큼으로부터 나온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몸과 마음을 던져 수행하라. 고행을 마다하지 말라. 어떠한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과감히 받아야만 한다. 그래야 탁월한 포교사가 가능해 진다. 인생은 어차피 떠도는 한 조각 구름이라 하지 않던가. 몸과 마음을 던져 갈고 닦으면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더라도 남는 게 있다. 어차피 인생은 수행. 고행하러 온 것, 열심히 수행하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열린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하물며 중생의 길이 이럴진대 불법을 홍보하고 포교하려는 원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을 그 누구보다 연단해야 한다. 고통을 마다하는 자, 고행을 고행으로 아는 자는 포교사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운 자이다. 포교는 말 몇 자락으로 되는 게 아니다. 자기의 수행과 고행을 극복한 체험을 바탕으로 한 자이다. 살다보면 이런저런 고통이 닥쳐 올 수 있다. 나무가 크면 그늘이 크듯이 깃드는 사람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포교란 항상 부처님을 예경하듯 그들을 예경하라 가르치는 것이다. 부처님을 믿듯이 중생을 믿으라 가르친다. 믿음이 없는 곳에 성취가 없다 하셨는데 중이 중생을 믿지 않으면 중생은 누굴 믿는가. 뜬금없는 인생, 모두 버리고 가는 인생, 그저 모두 주는 마음으로 베푸는 삶을 살다 가는 것이다. 포교사의 마음은 항상 부처님을 사랑하듯 중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부처님을 믿듯 중생을 믿어주는 사람이다. 포교에 뜻을 둔 사람은 그저 몸과 마음을 다해 갈고 닦고 자신을 버리는 마음으로 살아라. 그래야 마음 가운데 부처님 말씀이 흘러나온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항상 생각하라. 갈고 닦은 것만큼 성불한다. 어떠한 어려움도 흔쾌히 기쁜 마음으로 이겨낸다는 각오로 살아라. 모든 탁월한 수행자들이 탁월한 자의 길을 걸어 간 것처럼 고행과 난행이 없이는 탁월한 자의 길을 갈수가 없다. 탁월한 자의 길은 부처님의 길이며 위대한 보살의 길이다. 부처님께서는 왕궁의 영화를 버리고 고행 난행의 길을 가셨다. 무릇 성불의 길이란 버리는 길이기에 모두를 던지고 버리고 떠나는 고행의 길, 중도의 길이다. 중생의 길 또한 그 길을 따라야한다. 포교사의 길은 더 이상 말할 나위가 없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떠나라. 만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고 가르치신 부처님 말씀대로 고행과 난행의 길을 웃는 얼굴로 떠나야한다. 그 길 가운데 항상 부처님이 계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 했듯이 스스로가 스스로를 돕지 않으면 하늘도 도울 도리가 없다. 스스로 정진하라. 스스로 몸과 마음을 다해 정진하는 자만이 하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인간이 최선을 다하는 곳에서 하늘의 명을 기다린다 하지 않았는가. 최선을 다하라.</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몸과 마음을 다해 자신을 던지는 자만이 하늘의 소리를 듣는다. 하늘의 보살핌을 얻을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아들, 딸이지만 성실한 아들, 딸, 몸과 마음을 다해 정진하는 아들, 딸들이 더욱 더 사랑 받지 않겠는가. 떠오르는 태양도 제일 높은 봉우리를 먼저 비춘다. </P> <P class=바탕글>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o:p></o:p></P> <P class=바탕글>대낮이 돼야 계곡을 비춘다. 무엇이든 순서가 있다. 열심히 몸과 마음을 다해 고행 난행을 이겨내는 포교사, 법사만이 부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을 수 있음을 항상 명심하라. 우리는 이 땅에 고행하러, 수행하러 왔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 </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6:41관리자재가불자가 설 자리를 마련하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01&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8.23 15:39 입력 발행호수 : 1109 호 / 발행일 : 2011-08-24</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최근 교계신문에 조계종 종회의원 일문 스님이 재가불자들에게 사찰이나 종단에서 확실한 위치를 부여하고 그들의 능력을 십분 활용해야한다는 내용의 얘기를 해서 큰 호응을 얻었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그 같은 주장을 펴는 스님이나 재가불자들은 과거부터 계속 있어왔으나 별반 변한 게 없는 듯하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 시대, 유독 불교계만 변화에 초연한 것은 후진적 시스템 때문이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최근 서구에는 새로운 트렌드로 불교인구가 늘고 있다. 심리학, 의학, 물리학 분야를 비롯해 명상 등의 분야에서 불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세계적 추세 속에서 불교계도 그에 걸맞는 변화가 있어야할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승단이 사부대중으로 구성되었고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라고 부처님께서도 가르치셨는데 한국사찰이나 종단에서는 신도들은 그저 시주하는 존재정도로만 여겨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승단의 각종 정책이나 사업 등에 재가불자들이 얼마나 참여하고 있는지 분명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참여도가 여타 종교에 비해 대단히 미흡하다고 판단된다. 특히 포교는 시대 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해야만 한다. 빠르게 변화하는 각종 포교정책들의 입안에 재가 전문가 그룹들이 참여해야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그뿐이 아니다. 종교가 사회의 중요한 한 축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한 사회의 제반부면과 정합이 되어야한다. 이 같은 각종 부면에 스님들이 전문가가 아닌 한 재가자들의 도움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재가자들의 참여가 활성화될 수 있도록 사찰이나 종단에서 문호를 열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교의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불교인구가 늘지 않는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여타 종교와 달리 재가자들의 참여도가 높지 않기 때문으로 생각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신심 깊은 불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을 영입해 IT 부분이나 홍보, 출판, 영상, 포교 등에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면 불교는 분명 한 차원 업그레이드 될 것이다. 불교가 여타 종교에 뒤져있는 결정적 이유 가운데 하나는 탁월한 전문가 그룹을 각종 불교관계 업무 등에 제대로 활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스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지 생각해 보라. 스님들이 팔방미인은 아니지 않은가. 재가불자들을 종단 여러 부분에 영입해 그들의 의견들을 수렴할 수 있는 문호의 개방이 절실하다. 불교는 어떻게 보면 여타 종교보다 주지의 권한이 막강하다하지 않을 수 없다. 절의 주지가 신도들의 눈치를 보는 예가 있는가. 재량권의 차원으로 보면 여타 종교와는 비교할 바가 아니다. 사부대중이라고 말씀하신 부처님 가르침대로 종교도 사회 일부분이니 만큼 재가불자들의 활용도를 대폭 높여야한다. 스님이 할 수 있는 일과 재가불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그들에게 일정부분 힘을 실어 줘야 한다. 그들에게 설자리를 마련해 주어야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종교사업에 관한한 여타 종교의 시스템을 면밀히 연구할 필요가 있다. 나를 예로 봐도 다른 종교에 오랫동안 몸을 담고 살아왔기에 불교계의 취약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타종교에서 행하고 있는 각종 시스템과 재가신도들의 활용방법을 많이 보아왔기에 쉽게 사찰문화에 접목할 수 있었다. 사찰과 승단 고유의 전통을 이어나가는 것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새로운 시대문화를 승단과 사찰 등이 빠르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려면 재가불자들의 활용이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라 할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스님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과연 어디까지인가 하는 점을 분명히 정립하고 그 외의 문제는 재가불자들에게 맡겨야한다. 그래야 재가불자들도 승단 내에서 사찰 내에서 성장하게 되고 사찰은 또 다른 차원에서 발전을 도모할 수가 있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가 시대에 뒤쳐져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각종 부면에 재가불자들의 활용이 대단히 미흡하고 그들에게 걸맞는 입지를 제공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스님들이 기득권을 놓으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6:04관리자실패를 두려워 않는 서비스맨이 되라 /JiGwang/Gapi/Read.aspx?db_cnt=600&NOW_TITLE=gapi_story&NOW_PART=gapi_story_01&page=1<!--StartFragment-->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법보신문-2011.08.16 18:39 입력 발행호수 : 1108 호 / 발행일 : 2011-08-17</P> <P style="MARGIN-LEFT: 12pt" class=바탕글> </P><!--StartFragment--> <P class=바탕글>종교를 3차산업이라 부른 학자가 있었다. 종교가 서비스업이라는 의도였을 것이다. 종교가 서비스업이란 얘기에 반기를 드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이야기도 한번쯤은 음미하고 넘어갈 대목이 있지 않은가 생각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종교 자체가 중생의 해탈을 위해 존재한다고 한다면 분명 그 누구도 부처님처럼 무량중생들을 위한 중생제도 정신에 유념하지 않을 수 없으리라. 세속의 대통령도 스스로를 국민의 심부름꾼이라 부른다. 대재벌도 결국은 무량중생들에게 잘 팔리는 물건을 만들어야 돈을 벌 것이다. 중생들을 위한 서비스를 하지 않는 개인이나 단체가 도대체 이 세상에 존재할 가치가 있겠는가. 모두가 모두를 위한 서비스맨들이다. 종교도 예외일 수 없다. 종교에도 분명 서비스적인 측면이 있다. 포교사, 법사들은 이점을 분명히 이해해야 할 것이다. 종교가 서비스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질 높은 서비스를 제공해야만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과거 사람들이 물밀듯이 흘러들 때 서비스는커녕 모든 것이 귀찮을 때도 있었다. 사람들이 오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모든 걸 던지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출가할 때 무슨 이름을 얻으려 했겠는가. 포교하려 출가를 했다.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너무도 가르치지 않기에 제대로 좀 가르쳐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시작했던 게 뜻하지 않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모았던 것이다. 너무 놀랐다. 오늘에 이르고 보니 신도들에게 미안한 점이 한둘 아니다. 늦게 철이 나서인가. 요즘에는 항상 ‘나는 서비스맨이다. 영적인 정신적인 서비스맨이다’고 생각하며 신도들을 대한다.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하신 참뜻은 나를 버리고 모든 것을 중생을 위해 던지라는 가르침 아닌가.</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주변에 “자신은 깨닫지 못했으면서 중생을 제도한다는 게 말이 되냐”고 주장하는 분들이 계신다. 사홍서원을 보자. 제일 앞에 “가없는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부터 시작되지 않는가. 깨달은 분이 나타나기만 기다린다면 이 세상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다면 우리 중생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지장보살님은 ‘악도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기 전에는 결코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하셨다. 보살의 마음으로, 몸과 마음을 다해 서비스정신으로 무장하고 뛰어야 한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서비스정신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서비스해서는 될 일이 아니다. 섬세하게 정성스럽게 해야 한다. 또 질 높은 서비스를 위해 많은 생각과 고려가 있어야 한다. 이른바 현대사회를 살며 아이디어란 말을 많이 쓰는데 부처님께서도 아이디어를 강조하셨다. 부처님께서는 이를 10바라밀 가운데 방편바라밀이라 하여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중요하게 생각하셨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불교의 모든 의식이라든가 가르침 등은 하나같이 부처님 아이디어의 소산이다. 각종 질 높은 서비스를 위해서도 갖가지 아이디어를 내어 실험해 보아야한다. 지금은 예전 같지 않지만 반포에 있는 기독교 계통의 백화점에 자주 들린 적이 있다. 포교에 관한한 그들에게 배울 점이 있다면 참고 하는 게 무슨 죄가 되는가. 내가 타종교를 오래 믿었기에 불교포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점을 포교지망생 법사들에게 가끔 얘기한다. 갖가지 아이디어를 얻어서 자신의 포교당에 접목을 해보라. 잘될 때도 있고 실패할 때도 있을 것이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어느 철학자가 얘기했듯이 “실패가 인생의 바탕이다”란 말을 생각하라. 누구나 실패를 원치 않는다. 실패를 겪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가. 그러나 실패는 인생의 한 부분이며 수많은 실패 가운데 성공의 싹이 튼다. 죽을 것 같은 나쁜 일도 둘러보면 어느 곳엔가 새로운 문이 열려 있는 수가 있다.</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실패를 겪은 후 인생의 가치를 더 잘 인식케 되었다고 대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은가. 베트남에서 오랜 고문을 당했던 포로들 중 60%이상이 당시 겪었던 고통이 자신의 인생에 유익했다고 말했으며 더 많이 성장하고 성공했다는 사실이 무얼 말하는가. 포교사들이여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많이 실패해보라. 점차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다. </P> <P class=바탕글> </P> <P class=바탕글>지광 스님 서울 능인선원 원장</P> <P class=바탕글> </P>2012-03-07 오후 1:45:25관리자